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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profile 정부의 인문학 발전 기금이 인문학을 죽인 이유와 한국의 과학 발전 / 장재봉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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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과학기술연구개발에 더 많은 예산을 집행해왔지만 왜 점점 한국의 과학기술수준은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에 더 뒤쳐지거난 정체되는 것 같을까? 우리는 엄청난 헛돈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과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계의 실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것을 모른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평생 철학도로서 한국의 인문학의 실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인문학에도 정부는 엄청난 돈을 투자했고 또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인문학은 어떤가? 정부의 투자와는 정반대의 길위에 한국의 인문학이 서 있다. 고사 직전이 아니라, 한국의 인문학은 이미 죽었다.

한국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지만, 그래도 서점에는 인문학 서적이 출판이 된다. 그러나 독자들이 찾는 책은 대부분 외국번역서적이다. 외국인이 쓴 책들이다. 오랜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수많은 현대사의 굴곡을 겪어 온 것이 지금 대한민국이건만 변변한 인문학 서적 한 권 없다. 변변한 인문학 서적 한 권 출판할 만한 학자가 없다는 말이다. 수십개의 종합대학이 있고, 수천개의 인문학 전공학과가 있고, 이곳에서 평생 인문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모두 변변한 책 한 권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던진 학자라도 과연 있었던가?

한국의 인문학이 지지부진을 면치못하자 정부에서 지원을 시작했다. 일년에 막대한 예산을 인문학 지원을 위해서 투자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정부의 투자가 고사위기에 있던 인문학을 결정적으로 죽이고 만 것이다.

투자가 언제나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예가 바로 한국인문학에 대한 투자인 것이다.

정부는 인문학 지원을 위해서 인문학에 투자하면서 대상을 대학에 두었다. 대학교수의 지도 감독과 박사급 이상 몇 명, 석사급 이상 몇 명, 등 인문학 연구기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그렇게 두고, 기획안을 제출하면 심사하여 지원을 결정했다.

정부의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으로서는 일리 있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왜 주었는가에 대한 객관적인 신뢰할만한 증빙근거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일 것이다. 교수, 박사, 석사 등등.....객관적 자격을 갖춘 사람....

문제는 이것이 한국의 현실을 무시하고, 학계의 현실에 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한국 인문학의 특징은 경학적 태도에 있다. 이것은 사회학도 마찬가지 이다. 경학이란 어떤 것이 진리라는 믿음을 이미 가진 학문을 말한다. 불경, 성경, 사서오경 등. 각각의 경학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서술한 것이다. 한국의 학자들이 경학적이라는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암기식 교육을 해왔고, 대학에서도 교수의 강의에 얼마나 근접한 답을 쓰느냐에 따라 학점이 결정되고 여기에 익숙하고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살아왔고, 이런 것을 잘한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학계였고 대학이었고 대학교수였다. 선생의 말을 정확히 따르는 것이 좋은 학생이었다.

주자를 공부한 사람은 주자와 다른 주장을 이단으로 취급했듯이, 자신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취급했다. 이런 학문적 태도는 비단 동양학 분야뿐만 아니라, 서양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고, 사회학도 마찬가지였다. 헤겔을 공부한 사람은 자신이 배운 헤겔에 대한 이해만 진리로 간주했다. 이런 한국의 학문적 태도가 독창적인 인문학 연구를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고, 독창적인 인문학자의 배출을 막았던 것이다.

이런 한국의 학문적 성향을 가진 대학 교수들에게 정부 예산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학생들은 정부의 예산을 받기 위해서는 교수의 지지를 받아야했다. 교수는 학점 관리권 외에 다시 예산 집행권까지 가진 것이다. 경학적 성향을 가진 한국의 대학은 더욱 교조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학생들은 학점뿐만 아니라 정부가 제공하는 인문학 진흥 예산을 받기 위해서는 교수에게 더욱 더 굴복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갑중의 갑인 교수에게 더 큰 권한이 부여되면서 이제 대학원생은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노예는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창의성과 독창성은 자유에서 나오지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창의적인 학문은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 선생에게 배운 학문에 대해서 의심을 하면서 시작된다. 선진국에서는 교수의 이론에 비판을 제기하지 못하는 답안지는 절대로 좋을 학점을 주지 않는 이유이고, 또한 같은 대학 학부 졸업생을 대학원에서 좀 처럼 뽑지 않는 이유이다. 다른 교수에게 다른 생각을 배운 학생의 다른 주장과 비판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학문이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교수가 진리고 왕도이다. 교수는 자신의 권위를 고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생들을 더 많이 확보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줄서기로 나타난다. 줄을 서지 않는 순간 그 학생은 퇴출된다. 퇴출된 학생은 대학에서 흔한 시간강사 자리 하나도 얻지 못한다.
정부의 재정지원이 대학의 줄서기를 더욱 강화시켰고, 그 결과, 창의적인 사고와 생각을 가진 학생들은 한국의 대학에서 완전히 매장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창의적인 학생들이 말살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에는 한국인의 인문학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국의 자연과학은 인문학과 다를까?
이미 8,90년대 한국공대대학원생의 일은 교수가 맡은 프로잭트 대행업이었다. 교수는 돈을 받고 기업이나 정부에서 프로잭트를 따면 모든 일은 대학원생에게 맡기고 그 수익만 챙겨갔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원에 와서 교수프로잭트대행이나 하다가 졸업하는 것이다. 교수는 프로잭트를 약간 손질하여 논문으로 내게 하여 학위를 주는 것으로 댓가를 다 한 것으로 생색을 내었다.

지금까지 한국정부에서 지원한 과학기술연구기금이 이런식으로 대학교수들의 쌈짓돈으로 쓰였다면, 앞으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암울할 것이다. 뛰어난 과학자들을 감사위원으로 두어 연구프로잭트와 예산을 엄격히 통제하지 않는다면 , 정부가 예산을 투자해서, 뛰어난 젊은이들을 한국의 과학계에서 쫓아내어, 한국의 인문학을 죽인 것처럼, 한국의 과학을 죽였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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